2012년 8월 3일(금) 아침이다. 오늘 부터는 이번 여행의 주목적지인 블랙 힐스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다.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 아이다호, 와이오밍를 지나 몬타나에 오늘 와 있다.
오늘의 여정은 아침에 Red Lodge 시내의 Beartooth 마켓에서 장을 보고 몬타나의 큰 도시인 빌링스로
가서 새타이어로 교체를 하고 리틀 빅혼 격전지를 거쳐서 데블스 타워 까지 가는 일정이다.
빌링스는 15년전 이 곳을 여행할때 이틀간을 묵은 인연이 있는 도시다. 그때는 친척인 목사가 몬타나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빌링스에는 한인이 총30명 있었는데 그중 28명이 교인이었다.
그리고 서쪽에 보이즈멘(Bazeman)이라는 큰 도시가 있는데 그 곳엔 한인 유학생들이 많이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2명의 친척 목사는 두 도시를 번갈아서 오가며 목회를 하였다. 우리가 옐로우 스톤을
거쳐서 사우스 다코다를 여행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일요일(주일)엔 반드시 이 곳에 와서 묵고 예배도 드리고
가라고 명령(?)을 하여 아내와 딸 둘 그리고 나는 두 도시를 번갈아 오가며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아내는 두번의
특송을 하였고 딸 둘은 그동안 캠핑을 하면서 지친 몸을 충분히 쉬는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한인이 귀한 시절 여기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너무 우리에게 잘해주어서 이 도시의 기억이 아직 너무나 좋다.
새타이어로 교체하는 동안에 백인 주인은 우리에게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으라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새타이어로 교체도하고 5명의 일행들은 화장실 휴지까지도 교체하는 성의를 보이고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출발하였다.
몬타나는 경치가 일품이고 사람들도 너무 친절하여 나는 좋은면 만 기억할수 밖에 없는 그런 주(State)이다.
그리고 계속 212번 도로를 이용하여 찾아간 곳은 Little Bighorn Battlefield National Monument(리틀 빅혼 격전지)이다.
여기서 잠시 리틀 빅혼 전투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몬태나 남동부의 리틀 빅혼 강 위에 위치한 언덕에서 미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충돌이 바로 리틀
빅혼 전투입니다. 혼령이 가득한 서부의 땅인 이곳의 비탈에서 1876년 6월 25일 조지 A. 커스터가 이끄는 미육군 제7 기병대가
라코타 수 및 샤이엔 부족의 전사 부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장에서 충돌했던 삶과 문화에서 복잡다단함, 흥미진진함,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하이오 태생의 커스터는
웨스트 포인트에서 동기생 중 꼴찌로 졸업한 후 23세에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부군의 최연소 장군이 되었으며 전쟁 종료 후
무단이탈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지만 유목 생활을 하던 수 및 샤이엔 부족을 Great Sioux Reservation(대 수족 보호구역)으로
강제 수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면서 다코다주 변경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진지에서 부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7,000명에 이르는 수 및 샤이엔 부족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자 1876년 초여름 보호구역을 떠나
와이오밍과 몬태나 영토로 이주했습니다.
그랜트 정부는 군사 작전을 위해 3열 종대를 보냈습니다. 커스터 부대장을 비롯한 제7 기병대는 리틀 빅혼을 따라 설치된
인디언 야영지를 발견했고 커스터는 다른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647명의 대원들을 3조로 나눠 인디언 군사 상 최대라 할 수
있는 2,000명의 전사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곧 발발한 전투에서 커스터와 그의 동생을 포함해 263명의 제7 기병대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60명 이상의 인디언 전사들이 사망했습니다.
이 짧은 결전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전투의 대부분은 6월 25일 3시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350명의 대원들은 27일 반나절까지 포위되어 있었음). 기념비의 방문객 센터는 흥미진진한 전시물과 배경 정보를 제공합니다.
방문 센터에서 언덕을 올라가면 라스트 스탠드 힐 기념비가 있는데 이곳에서 제7 기병대의 마지막 대원이 사망했습니다.
대원들의 시체가 발견된 곳에는 무덤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커스터는 웨스트 포인트에 묻혔습니다.)
홀로 또는 무리 지어 있는 몇몇 표지를 비롯해 커스터가 발견된 곳 주변의 많은 표지들을 확인하며 풀이 무성한 언덕 아래를
바라보면 당시 전투의 참사가 생생하게 전해져 옵니다. 2003년 국립공원 관리청은 리틀 빅혼 전투지에 세운 인디언 기념비를
공개했는데, 이 기념비는 당시 전투에 대한 인디언들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인디언 전사를 상징하는 ‘스피릿 워리어’와
전투에 가담한 인디언 여성의 동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리틀 빅혼 전투지 국립 기념비는 크로 인디언보호구역에 위치해 있는데 8,900제곱킬로미터의 땅 위에 넘실거리는 평원과
거친 언덕이 펼쳐진 이곳은 몬태나 최대의 보호구역입니다.
8월 말이 되면 최대의 아메리칸 인디언 행사 중 하나로 꼽히는 크로 페어가 열려 수천 명의 부족민과 방문객이 모여 춤 경연대회,
일일 행진, 인디언 로데오, 야생마 경주 등을 즐깁니다. 이 행사 기간 동안 형성되는 임시 야영장은 "티피의 수도"로 알려져 있는데
한 장소에 이렇게 많이 설치된 티피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입니다.
(인용한 글임)
전쟁 기념비 앞에선 아내(지씨아줌나) 와 나(세울림)
이 전투는 1876년 6월 25일에 있었다.
수우족(Sioux) 인디언 추장인 이 전쟁의 승리자 시팅 불(Sitting Bull) 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또 다른 인디언 영웅인 크래이지 호스의 사진이다.
타슝카 위트코(라코타어: Thašųka Witko ‘그의 말은 미쳤다’, 1840년 가을 무렵 ~ 1877년 9월 5일) 또는 크레이지 호스(영어: Crazy Horse)는 미국군대에 맞서 라코타족의 전통과 생존을 위해 싸운 존경받는 족장이자, 전쟁지도자이다. 크레이지 호스를 번역하여 미친 말
또는 성난 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틀빅혼 전투에서 시팅 불과 연합하여, 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후 미군에게 쫓기다가 1877년 암살당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서
러시모어 산이 위치해 있는 블랙 힐스로 부터 2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이라는 조각상을 만들고 있다.
(크래이지 호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상세하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커스터 장군의 사진이고 마지막 결전을 하는 장면이다.
▲ “리틀빅혼”의 전투를 실감나게 영상화한 “카스터 장군과 리틀빅혼”의 한장면
1876년 6월 미육군 사령관 테리 장군은 조지 암스트롱 카스터 중령을 대장으로 하는 약 270여명의 제7 기병 연대에 수우족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카스터 장군은 너무 자신만만 했었기에 테리 장군의 본대가 수우족들을 포위한
연후에 공격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판단력으로 무리한 진격을 시도했습니다.
시팅불의 인디언 병력이 약 3,500여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카스터 연대가 막상 수우족 진영에 진입했을때, 자기들보다 무려 10배가 넘는 인디언들의 무리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으나 이미 오도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져있었습니다. 수우족에게 완전 포위된 것입니다.
카스터의 병사들은 맹렬히 저항했으나 전투 개시 얼마 안되어 모조리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는 “리틀 빅혼”이라 불리었고 그후 이 지역의 이름이 리틀 빅혼이 되었습니다.
카스터 중령은 사후(死後) 장군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전투가 발생한 다음날 테리 장군의 본대가 이곳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머리 가죽이 벗겨진 카스터 중령의 시체와 264명의 병사들의 흉한 시체들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후 수년동안 미육군과 수우족과의 싸움이 계속되다가 1881년에 쌍방 화해를 하고 평화공존이 되는가 싶었습니다.
수우족의 추장인 시팅불이 “버팔로 빌”의 쇼에 출연 한 적도 있었습니다. 1890년 다시 분쟁이 발생하고 대대적인 저항을 하던
추장 ‘시팅불’은 사살되고 수우족들은 막강한 화력의 미육군에 항복하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이처럼 블랙힐스 주변은 인디언들과 미 육군의 최대 격전지로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캐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서부의 대서사극도 이 수우족과의 전투를 배경으로 와이오밍의 대평원과
사우스 다코다의 블랙 힐스 지역에서 촬영되었다고 합니다.
15년전 이 곳을 처음 방문했을때 이러한 역사적 아픔이 있는것을 알고 가슴이 찡함을 느꼈다.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느꼈던 그 싸~~~한 감정은 늘 내 마음속 한구석에 남아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인디언 투어를 신청하여 역사적 사실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성의를 가지고 이 곳을 대하려고 핝다.
운좋게도 마지막 투어인 3시에 출발하는 것을 신청할수 있었다.
투어 신청를 하고 남은 시간 동안 방문자 센터에서 영화를 보고 전시한 것도 보기로 한다.
이런식으로 전투는 진행되었다.
위에 표시된것 처럼 빅혼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는 치루어졌다.
인디언 전사의 모형이다. 인디언도 그 전투에서 총기를 사용하였고 활도 동시에 사용하였다.
인디언의 용맹스런 용사들이다. (사진에서 잠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
미육군부대 제 7기병대를 이끈 사람들의 모습이다.
리틀 빅혼 전투에서 사용한 총기류이다.
그 당시 인디언, 백인 정치 지도자이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격전지 모습이다. 격렬함 그 자체를 볼수있다.
방문자 센타에서 볼수있는 마지막 격전지(Last Stanf Hill)에 세워진 기념비를 향하여 걸어 올라가는 길이다.
마치 인디언의 숨결이 느껴지는 둣 하다.
직접 걸어서 주위 격전지의 모습을 관찰할수 있다.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진정한 힘이 곧 평화다? 또는 힘은 곧 평화다 라는 사실을 알아라? 라고 해야하는건지,,,,,
아무튼 내 실력으론 어러운 문장이다.(제대로 잘 표현해 주실분 댓글로 올려주시기를,,,)
마지막 격전지에 있는 기념비까지 걸어서 오고 가는 사람들,,,
저기 성조기 아래에 있는 무덤은 그냥 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 등에 참가했다가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묘비이다.
인디언 안내를 받으면서 투어버스에 타고 가면서 찍은 사진이다.
인디언 혼이 서려서인지 사진이라기 보다는 마치 한폭 그림 같아 보인다.
첫번째 격전지인 리노 벤틴 방어선(리노 격전지)에 와서 차에서 내렸다.
역사의 장소에 엄숙히 선 우리 일행 다섯명 이다.
아래쪽으론 초록색의 평화스럽게 보이는 마을이 보인다.
우리를 여기까지 싣고온 인디언 투어 차량이다.
그 당시 전투 상황을 설명해 놓았고 묘비도 보인다.
누가 언제 이 장소에서 죽었다는 표시의 묘비다.
1876년 6월 25일이 그 날이다. 아~~~~ 상기하자 육이오,,,,,, 강을 건넌 시간은 오후 4시경이다.
줌으로 당겨서 보는 바로 역사의 그 빅혼 강이다.
그냥 보기에는 너무 평화스럽게 보이는 이 지역이 미국 인디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곳이라니,,,,,
이 곳은 리노 격전지에 서 있는 기념비이다.
전쟁과 평화를 동시에 느끼며 바라볼수 있는 그런 곳이다.
이 곳에서 인디언 가이드 청년은 자신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전파한다.
우리와 생김새가 많이 닮지 아니한가?
고개를 숙여 잠시 그날을 생각하면서 묵상애 잠겨본다.
하얀 묘비가 보이는 곳은 시체가 쓰러진 곳을 표시한다.
이 장소에선 무리가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하였다.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커스터 장군은 여기서 인디언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였다.
장군 주위에는 많은 제7기병대 용사가 에워싸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남북 전쟁의 영웅도 이 곳에선 한낱 보통 인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수있다.
바로 그 마지막 격전지 위에 서있는 기념비이다.
하늘 아래로 내리 깔은 구름은 그때의 분위기를 잘 연출하는 듯하다.
아래로 보이는 방문자 센테도 그런 분위기를 보여준다.
후에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이 전투는 토착 인디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우유부단한 정책이 원인이 되었다.
제2차 라라미 요새 조약에 따라 미주리 강 서쪽 다코타 지역에 대한 인디언의 독점권이 보장됐지만,
백인들은 금을 찾아 인디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다코타 땅에 들어와 살았다.
미국 정부는 백인 정착자를 내보내지도, 다코타족에게 그 땅을 팔라고 설득하지도 않고 인디언들이 가끔 백인 거주지역을
공격하는 것을 조약의 위반이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1876년 1월 31일까지 지정된 보호구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인디언을
미국의 적대적인 존재로 간주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이 사냥꾼들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겨울이라 이동하기 어려웠으며, 많은 평원 인디언들이 더이상 백인에게 양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단단히 했기 때문에
상호 충돌은 불가피했다.
1876년 6월 미국 정부는 앨프레드 H. 테리 준장의 군대를 파견해 인디언 지역을 샅샅이 수색하도록 했다.
테리는 인디언의 이동을 리틀 빅혼 강 어귀에서 막을 생각으로 주력부대를 옐로스톤 강 상류로 이동하고,
커스터 중령과 제7기병대는 로즈버드 강을 따라 올라가 리틀 빅혼 강을 건넜다.
이 두 부대는 인디언을 포위 공격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커스터 중령은 사흘간 진군한 끝에
그 근처에 캠프를 친 대규모의 수우족 및 샤이엔족 인디언과 갑자기 마주쳐 그 작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대신 3갈래 공격 작전을 세워 프레더릭 벤틴 대위와 마커스 리노 소령에게 강 양쪽에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고
자신은 북서쪽으로 가서 인디언 캠프를 급습하기로 했다.
커스터가 캠프의 북쪽 가장 자리에 닿기 전에 첫번째 공격을 감행한 리노는 인디언에게 완전히 패했다.(리노 격전지 기념비 있는곳)
그는 전략상 수세에 몰려 강을 건너 퇴각했다. 이렇게 되자 벤틴의 부대가 리노 부대와 합류해 참호를 파서 싸움을 계속했다.
리노 휘하의 부대가 후퇴하자 커스터 부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인디언 주력 부대는 커스터 부대를 공격하여 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1시간 동안에 커스터 부대를 완전히 전멸시켰다.
이 전투로 인디언 전세의 막강함이 입증되었지만, 백인들의 경악과 분노를 초래해 결과적으로 이 지역의 운명이 결정되고 말았다.
미국 정부군이 그뒤 이 지역에 물밀듯이 쳐들어왔고, 결국 인디언은 항복하고 말았다.
내려오는 길에 말위를 달리는 인디언 모형을 발견할수 있었다.
말을 타고 진격하는 인디언의 모습이다.
세 개의 다른 사람 모양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사람의 모습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중간 사람의 모습
제일 앞에서 말을 달리는 인디언 모습이다.
자꾸 볼수록 표한 느낌이 마음에 일어난다.
여러분들도 한 사람씩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댓글에 표시하여 주면 좋겠다.
과연 어떤 느낌을 받는가? 무척 궁금하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리틀 빅혼 격전지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이 곳에서 느낀 감정으로 인하여 가슴이 너무 뭉클하여 설명을 다시 번복하지 않을수 없다,
리틀 빅혼 전투는 1876년, 인디언 학살자로 유명한 커스터 중령이 인디언들과 벌인 전투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을 맺고 다음편은 데블스 타워에 대하여 싣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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